-익명의 동물들과 함께 쓰기.

룹앤테일(김영주+조호연)은 코로나19가 확산되던 시기, 집안에 갇혀 있던 익명의 유저들을 모아 각자의 우울증 경험을 드러내는 실험적인 온라인 워크숍을 한 적이 있다. 방법은 간단했는데 구글 독스로 공유문서를 만들어 그들을 접속시키고 각자 자유롭게 글을 쓰도록 놔 둔 것이다. 공유문서를 만들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경우 문장은 그 누구의 것이 아니라 공동의 것이 되며, 하나의 논리를 따라가기보다는 제각각의 생각들이 화면 모든 곳에서 전개되는 장관이 펼쳐진다. 본래 캐릭터(*Character)*라는 말이 어원 상 각인하는 행위를 의미하고 그래서 우리가 문자기호와 인격을 모두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한다는 것을 상기하자. 즉 무엇인가를 쓴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을 드러내는 일이다. 자아효능감이 바닥을 친 사람에게 쓰는 일은 단지 내면을 표현하는 일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온라인 공간에 각인하는 일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들이 세상의 모든 동물들의 아바타로 등장해 자유롭게 활보했다. 공유문서 상에서 익명의 유저들은 익명의 악어, 익명의 아르마딜로, 익명의 오소리, 익명의 비버 등으로 표현되어 화면 안을 가득 채우는데, 작가는 이 장면이 이상하게 자신의 마음을 울렸다고 증언한다. 함께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존재로 이양될 필요가 있다. 이름과 소속, 성별 등의 인간적인 요소들은 우리를 함께 만들기보다는 서로 구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가 평평하게 다시 재창조되고, 익명의 아르마딜로 같은 새로운 명명을 받을 때 그들은 기꺼이 함께 하는 존재가 되었다. 코로나블루에 빠져 있던 사람들은 인간의 가면을 버리고 동물들의 가면을 쓰면서 더 적극적으로 함께 만들었던 것이다.

도나 헤러웨이는 저서 <Staying with the Trouble>(2016)에서 북극의 이누이트 족의 설화와 관습을 담은 게임 <Never alone>(2014)을 논평하면서 게임 내에서 인간인 플레이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고, 주변환경과 동물들과 함께 해야만 클리어 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게임디자인이야말로 전형적인 인간성을 넘어서 그 외 존재들과 ‘함께 만들기’ 즉 심포이에시스(sympoiesis)의 태도라고 말한다.

-당신이 두 번째 구역을 열었다는 사실이 외부에 전달되었습니다.

룹앤테일의 최신작 <Mechanimal>(2021)은 비인간 객체들에 대한 탐구와 온라인 공간 속에서 익명성을 통한 ‘같이 있음’의 문제를 고민한 아트게임 작품이다. 관객인 플레이어는 인터넷 브라우저를 통해 3D공간에 접속하게 되는데, 이 곳이 누군가의 실험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문서를 읽어볼 수 있는데, 도나 헤러웨어의 <반려종 선언>의 문장이거나 이 실험실의 주인이 연구하던 어떤 종에 대한 단서들임을 확인한다.

<Mechanimal>은 전통적인 어드벤처 게임의 문법을 차용하면서 플레이어로 하여금 고의적으로 헤메도록 만든다. 일반적으로 어드벤처라는 장르가 추구하는 모험의 본질이란 wasd키로 상하좌우, 게임적 공간을 훑어대면서 숨겨진 문서나 아이템을 찾고 이들을 엮어 어떤 이야기를 추측하고 체감하는 일이다. 지속적으로 게임 공간에 머물 수 있도록 스토리텔링의 조각들을 제공하면서 미스테리한 톤을 계속 유지하는 일이 중요하다.

룹앤테일의 게임디자인은 실험실 주인의 실종이라는 테마로 플레이어에게 추리에 참여할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이 추리극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게임적으로 기능하는 장치일 뿐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는 아니다. 실험실 주인의 실종 테마는 맥거핀이다. 어쩌면 이 작품에서 인간형 객체는 고의적으로 실종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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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이 공간 안을 탐험하면서 겪는 경험이다. 플레이어로서 인상적이었던 경험을 말해 보겠다. 작품 설명에 “웹브라우저 게임 + 트위터 연동”이라고 적혀 있는 만큼 아이디 Mechanimal의 트위터를 주시하고 있었는데, 게임 공간의 퍼즐을 풀자 한 8초정도 딜레이가 생긴 다음 필자의 화면이 Mechanimal 계정으로 공유되었다. 황당하면서도 한편으론 기뻤다. 우선 내가 트로피를 획득한 기분이 들었고 이 공간에서의 탐험경험이 무(無)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필자 말고도 다른 두 명의 존재를 이어 확인했다는 것이다. 한 명은 접속의 방식을 확인하기 위해 입장시킨 필자의 지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혀 모르는 익명의 존재였다. 필자가 한 공간을 해금하자 그들도 각자 자신의 해금 소식을 알려왔다. 게임 공간 안에서는 만날 수 없었지만 그들은 지금 여기에 같이 있었던 것이다. 트위터에는 ‘당신’이라는 익명으로 표현되고 있기에 우리 모두는 ‘당신’들 이었다. 이 기묘한 동거의 방식은 이 게임공간의 주된 정조인 멜랑콜리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바꾸어 버렸다. 갑자기 그들과 기꺼이 협력하고 싶어진 것이다. 이것은 목적이 있는 협력이 아니라 목적이 없는 협력, 협력의 충동같은 것이었다.

비밀스럽게 공간을 해금했지만 그 사실이 트위터로 온 천하에 중계되는 순간 나 자신은 온라인 공간에 공식적으로 각인됨으로써 어떤 가치를 얻게 된다. <Mechanimal>이 차용하는 방탈출이라는 익숙한 형식은 큐브화된 공간에서 현대인의 고독한 투쟁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공간을 무조건 탈출하고 또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 레벨업을 해야 하는 존재가 되어 어쩌면 의미없는 게임 플레이를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많은 예술가들이 게임엔진이라는 새로운 표현도구를 사용하지만 언제나 실패하는 것이 이 지점이다. 게임적 양식과 기술을 사용해 가상의 현실을 구축하지만 그 가상적 게임공간 안에 플레이어를 가두어 버리고 플레이어가 게임 밖으로 사유할 여지를 얻지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룹앤테일은 방탈출이라는 장르를 익명의 유저와 같이 하는 방식으로 바꾸고, 그것을 게임 밖으로 확장시킴으로써 무기력화된 개인들을 익명의 공동적 존재로 호출했다.

-바로 우리 곁에 있는 반려종들을 생각하기.